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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예술발전소 < How to see a plum blossom and wild birds > Intallation view 

관매화산금(觀梅花山禽:How to see a plum blossom and wild birds) (가창창작스튜디오_스페이스 가창, 20170822 -0915)

고동연(미술평론가, 미술사가)
 관찰과 관념 사이에서: 진민욱이 매화와 산새를 보는 방법

 "현재 나는 매번 새로운 경험을 덮어쓰기 하듯 하나라도 더 덧그려 끝없이 확장하는 감동의 세계를 그려내고자 하는 욕망과 관찰한 세계의 시각적 정보를 담담히 옮기고자 하는 욕망의 모순을 가다듬어가면서 점진적으로 화면을 채워나간다." (진민욱, 작가 스테이트먼트, 2017)

 평소 비단의 앞과 뒤쪽에 여러 번 채색을 반복해서 완성해가는 진민욱의 체계적인 창작과정을 떠올릴 때 '욕망'이라는 단어는 어울리지 않는다. '욕망'은 절제가 되지 않거나 즉흥적인 작업을 지칭할 때 더 흔히 사용되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작가 스스로가 욕망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게 된 것은 욕망이라는 단어가 불러일으키는 즉흥성보다는 작가의 내적 고민이 지닌 밀도 때문일 것이다. 물론 욕망이나 욕구를 분류해서 설명하거나 정의하기란 힘들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상에 대한 자신의 정서적 반응을 표현하는 일과 대상을 철저하게 실증주의적인 입장에서 관찰하고 그 결과를 세밀하게 기록해내는 일은 전혀 다른 작가적 자아와 태도를 필요로 한다. 욕망과 같이 강렬한 단어가 사용된 것도 상반된 방법론에 대한 본인의 내적 갈등을 보다 생생히 표현하기 위함일 것이다.
 진민욱의 관매화산금(觀梅花山禽)에서도 두 가지 서로 상반된 접근방식이 감지된다. 원래 '매화산금도'의 제목과 구도는 송(宋) 휘종(徽宗)의 유명한 화풍으로부터 유래하였고, 남송화단은 중국 강남지방의 나지막한 산과 물이 많은 자연환경을 위주로 안개 자욱한 대기의 묘사나 눈 덮인 마을의 표현으로 유명하다. 따라서 자연을 매우 세밀하게 관찰하고 충실하게 재현하는 것을 특징으로 하는 남송원체 화풍은 미리 주어진 특정 이미지에 천작하는 순수 관념 산수화와는 구별되어 왔다. 동시에 남송화풍에서 강조하는 자연미 또한 궁극적으로 자연이 보는 이의 마음에 꽂힌 어떠한 상을 토대로 하고자 한다는 점에서는 순수 사실주의적이고 실증주의적인 풍경화풍과도 차이를 보인다.
 '관매화산금' 시리즈는 동양화의 근본적인 고민거리들을 극대화해서 다뤄보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작가는 시시각각, 그리고 서로 다른 장소에서 관찰한 새와 매화의 풍경을 기록한 드로잉과 사진을 함께 컴퓨터에 저장해 놓았다. 기억의 불완전함을 철저하게 극복하기 위한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전시기법을 통하여 보는 이의 가변성도 극대화하고자 하였다. 남송화단의 풍경화에 걸어가면서 자연풍경을 관찰하는 인간 존재가 명확히 암시되어 있듯이 진민욱은 인간의 신체가 자연과 만나게 될 때 개입되는 시간적인 추이를 여과 없이 작업에 드러내고자 하였다. 이를 통하여 작가는 동서양과 고금을 막론하고 작가를 괴롭혔던 질문에 다가간다. 작가에게 본다는 문제는 무엇인가?

관매화산금: '걸으면서 보기(步步觀)'

"2017년 1월, 4월 두 차례 찾은 창덕궁의 만첩홍매를 다양한 각도에서 여러 차례 돌아보며 머릿속 관념적인 매화의 이미지 속에서 새로운 모습을 보게 되었고 고정된 피사체를 한쪽 방향에서 보는 평면의 한계를 벗어나고자 시도하게 되었다." (진민욱, 작가 스테이트먼트, 2017)

 '사실주의'와 심상을 반영한 '변형'이라는 상반되는 화풍은 진민욱의 작업 초기부터 공존하여 왔다. 2011년 동물들의 형태를 변형시킨 "꿈과 현실의 경계"의 전시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작가는 세밀한 붓을 사용하여 동물들의 모습을 매우 가까이에서 묘사하면서도 서구식 원근법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과격하게 원경과 근경을 배치함으로써 통상적인 동물과 풍경의 크기를 극도로 왜곡시켰다. "꿈"이라는 타이틀에 걸맞게 자연 속의 한 개체에 불과한 동물의 형태는 원경의 도시풍경이나 건물보다 지나치게 거대하다.
 2011-2012년 동물 시리즈가 "마음의 눈으로 본다"는 남송 화가들이나 전혀 다른 맥락이지만 현상세계 너머에 자리 잡고 있는 억제된 무의식의 세계를 드러내려 하였던 초현실주의자들의 영향을 보여준다고 한다면, 최근 진민욱의 「관매화산금」은 아예 현상세계를 관찰해가고 파악해가는 그 과정 자체에 방점을 두고 있다. 즉 보는 행위가 작가의 주된 관심사가 된 것이다. 진민욱이 최근 읽은 작가 출신 저술가 마틴 게이퍼드(Martin Gayford)의 호크니(David Hockney) 인터뷰 또한 20세기 초부터 서구 유럽에서 제기된 현상학과 보는 행위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사를 표출한다. 영국에서 미국 캘리포니아 지역으로 옮겨간 후 호크니의 그림은 나른한 캘리포니아의 일상적 풍경에서부터 점차로 서구 회화의 고전적인 문제로 옮아갔다. 유럽에서 미국으로 건너간 후에 호크니는 오히려 20세기 초 유럽의 자연주의적인 추상화가, 입체파 화가들이 관심을 지녔던 사물의 본질을 철저하게 현상학적인 입장에서 탐구하는 방식에 몰입하였다. 진민욱의 경우에도 사생과 사색, 실증주의적인 접근 방법과 정서적인 접근 방법의 서로 다른 두 축을 사물이나 자연세계를 인식하는 자연스럽고 균형 잡힌 시각으로 인식하던 통상적인 태도에서부터 벗어나서 동서양을 막론하고 모든 예술가들을 괴롭히는 근본적인 질문에 매달리고 있다. 우리는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지난 2년간 진민욱 작가가 모아온 자료는 방대하다. 그녀는 「이태원매규도(梨泰院梅葵圖)」나 「연희매화작필도(延禧梅花雀鵯圖)」와 같이 그가 관찰한 지역의 이름을 따고 그 지역의 꽃과 새를 거의 생물학자와 같이 세밀하게 기록하여 왔다. 작가는 『관매화산금』을 준비하는 과정에서도 2017년 1월, 4월 두 차례 찾은 창덕궁의 만첩홍매를 다양한 각도에서 여러 차례 돌아보았다.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는 관념적인 매화, 새의 이미지들"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자기 극복의 과정이었다. 또한 작가는 서울도심의 각 지역에서 수집한 새들의 이미지를 동일한 가지 위에 펼쳐놓거나 각각의 작은 그림들을 연결시켜서 수평적으로 펼쳐진 화폭들 속에 각기 다른 장소와 시간대에 작가가 관찰한 산새들의 모습들이 공존하도록 만들었다. 호크니가 사진기를 사용해서 자신을 둘러싼 일상적인 공간의 모습을 지난 30-40년간 꾸준히 기록하고 그 편린들을 모아서 콜라주 하듯이 한 화면에 겹쳐 놓았다면, 진민욱도 『관매화산금』에서 걸으면서 본다는 작품 제목이 암시하는 바와 같이 고정된 시점이 아닌 여러 시점에서 관찰한 새와 매화 가지의 모습이 한 화면에 집적되어 있다.
 물론 고정된 시점은 서구 원근법에나 있는 불문율이다. 그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동양화는 오랫동안 느슨하게 보는 이의 위치를 규정하여 왔다. 정보를 보다 원활하게 전달하기 위하여, 대상의 가장 이상적인 상태를 잘 구현하기 위하여 관찰자의 시점은 얼마든지 유동적으로 바뀌어 왔다. 그러나 진민욱의 작업에서 (혹은 유사한 의미에서 호크니의 경우) 흥미로운 점은 다양한 시점이 공존하고 있는 상황이 관찰자의 눈에 보이도록 이음새를 매끈하게 만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매화가지에 앉아 있는 새들의 모습을 그린 여러 폭의 화폭들은 가지의 형태나 대상과의 거리감에 따라 어느 정도 연결되기는 하지만 결코 동일한 시점에서 연속적으로 수평운동을 해서 얻어진 그림은 아니다. "걸으면서 보다"는 엄밀히 말해서 시점의 단순 이동 정도가 아니라 우월적인 관찰자의 시점을 부정하고 아예 관찰자의 유동적인 존재감을 강하게 부각시키기 위한 것이다.

관념 산수화를 해체한다는 것은

 마지막으로 진민욱의 작업을 서양 미학사에 등장하는 현상학과의 연관성에서 언급해 보고자 한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1940-50년대 메롤로 퐁티(Maurice Merleau-Ponty)의 현상학은 1960년대 북유럽의 조각과 회화를 이해하는 과정에서, 거슬러 올라가서 대상을 매우 분석적이면서도 직관적으로 해체하고 재조립하고자 하였던 20세기 초 세잔(Paul Cezanne)에 이르기까지 현대미술이 어떻게 인간의 시각적 경험에 대한 오해를 개선하고 그 폭을 확장시켰는지를 이론화하는 데에 사용되었다.
 진민욱은 또한 최근작들에서 자연과 인간이 보다 유동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는 과정을 집중적으로 다루어왔다. 2017년 스페이스에무에서 열린 기획전에서도 작가는 관객을 에워싸듯이 여러 화폭을 이어 설치하는 방식을 계획하였고, 관객 스스로가 영화를 보듯이 시간을 들여 옆으로 걸어가면서 그림을 감상하도록 유도하였다. 이와 같은 형식은 주어진 대상을 관념적으로나 관습적으로만 인식하는 폐해를 막기 위한 것이다. 진민욱은 이와 같은 접근은 조선후기의 화가 정선의 「금강전도(金剛全圖)」와 같이 산에 올라 두루 둘러보면서 여러 시점에서 관찰한 산의 집합체를 그리는 진경산수화의 관찰법을 일상적인 대상물에 적용한 것이라 말한다. 이러한 태도는 대상과의 친밀하고 실질적이며 유동적인 만남을 중시하는 메를로 퐁티의 현상학 이론에서도 개진된 바 있다. 메를로 퐁티 또한 대상에 대한 관념적 이해야말로 몸을 이용해서 실제 공간에서 대상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좌절시키는 문제적 습관으로 여겼다. (메를로 퐁티는 서구 철학에서 지식 채득의 근본적인 수단으로 인간의 의식(consciousness)을 손꼽아 온 오류를 수정하기 위하여 세상을 인식하는 과정에서 몸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이와 연관하여 관념적이고 객관적인 경험을 중시하는 과학에 비하여 예술을 가변적이고 주관적인 경험을 강조하는 분야로 설명하였다.
 
그렇다면 과연 진민욱의 작업은 얼마만큼 동양화에서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재규정하는 데 기여하고 있는가? 메를로 퐁티가 서구철학에서 상정하여온 인간의 경험에 대한 인식을 확장하고자 하였다면 진민욱이 관념적인 산수화의 접근법을 해체하려는 시도는 과연 어떤 미학적 의미를 지니는가? 작가는 자신의 목적이 철저하게 실증주의적으로 대상을 접근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대상을 바라보는 고정된 시각을 작업을 통해 지속적으로 확장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힌다. 이에 필자는 매우 조심스럽지만 문인화의 전통과 현대 여성작가들의 관계는 어떠한 것인지에 대하여 질문을 던지고자 한다. 과연 자연을 인식하는 과정에서 젠더에 따른 차이가 존재하는가? 황당하지만 생각만 해도 흥미롭고 신나는 질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