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춘지경(常春之景) (스페이스 루,  2018.03.14.-03.26)
 
송희경(이화여대 겸임교수)
I. 상춘(常春)과 미물(微物)의 조화
 봄이 부여하는 의미는 각양각색이다. 따뜻한 대기가 생성하는 여유로움, 파릇파릇 새싹이 돋아나고 울긋불긋 꽃이 피는 신비로움, 옷깃에 스치는 봄바람에서 묻어나는 설렘, 새로운 학기를 맞이하는 긴장감. 각각의 느낌은 다를지 모르지만 봄의 감성이 자아내는 공통점은 소생하는 만물에 내재된 희망과 기대일 것이다.
 한국화가 진민욱은 2018 개인전(常春之景)에서 '언제나 봄'을 뜻하는 '상춘(常春)'의 정경을 선보였다. 일반적으로 동양미학에서 봄은 추운 겨울을 극복하고 맞이한 인내의 계절이자,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이상향의 표상으로 사랑받아왔다. 이에 작가는 소식(蘇軾, 1037-1101)이 북송대 왕선(王詵)의 「연강첩장도(烟江疊嶂圖)」를 감상하고 지은 "복사꽃 흐르는 물 인간 세상에도 있으니, 무릉도원이 어찌 신선이 사는 곳뿐이랴(桃花流水在人世 武陵豈必皆神仙)"와, 조선 중기 문신이자 서예가인 양사언(楊士彦, 1517-1584)의 "봄이 깊어가니 복사꽃 자두꽃 모두 꽃봉오리 옥처럼 아름답고, 천년세월 풍파를 견딘 푸름이 절정에 달했구나(長春桃李皆瓊蘂 千嵗喬松盡黒頭)"의 시구에서 상춘 개념의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널리 알려졌듯이 도화(桃花)와 무릉(武陵)은 위진남북조 시대의 시인인 도연명(陶淵明, 365- 427)의< < 도화원기(桃花源記) > >    에 등장하는 시어로서,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유토피아를 뜻하는 상징으로 사랑받아 왔다. 복숭아꽃이 피었으니 절기로 따지면 분명히 봄이겠지만, < < 도화원기 > > 봄은 모든 백성이 근심 걱정 없이 즐겁게 지낸다는 평화의 의미를 지닌다. 양사언이 언급한 장춘(長春)은 화창한 봄날이 계속되는 것처럼 즐거운 삶의 영원함 가리키거나, 불로장생을 가능케 하는 신선주(神仙酒)를 뜻하기도 한다. 결국 진민욱이 뜻하는 상춘은 3월, 4월에 해당되는 시간적인 봄이 아니라 언제나 안정과 온화함을 느끼는 심리적인 봄이며, 일상에서 조우하는 소소한 자연경과의 교감을 통해 체험하는 아름다움 그 자체이다.
 상춘의 미적 체험을 시각화하기 위해 작가는 주변에서 발견되는 작은 풍경을 유심히 관찰하여 봄의 미학을 시각적으로 투영하고자 했다. 진민욱이 주변 미물에 집중한 것은 이미 오래전부터이다. 「Snowscape」(2013)에서는 사람의 가장 친한 친구인 강아지들이 눈밭에 서 있는 모습을 포착했고, 「기억의 풍경」(2014)에서는 건물 위에 늘어선 비둘기를 확대하여 화면에 배치했다. 인간과 친숙한 소재를 찬찬히 관찰하면서 꾸준히 시선을 보낸 그의 작업 태도는 개, 새 등 하나의 개체를 부각했던 방식에서, 꽃이 어우러진 화목(花木), 겹겹이 중첩되어 보이는 건물들, 수목, 바위, 새가 머문 공원 등,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매체의 공존으로 전환된다. 즉 평범한 경치를 거닐며 관찰하는 '소소경(逍小景)'을 한층 더 심화한 셈이다.
 그의 시선이 머무는 지점은 도시를 구성하는 중첩된 건물들, 전선 위에 앉은 새, 눈부시게 만개한 매화, 담장 울타리에 늘어선 나무들, 도심 속 오솔길에 펼쳐진 보잘 것 없는 수풀과 돌멩이 등, 언제나 쉽게 만날 수 있는 평범한 미물(微物)이다.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누구나 쉽게 목격할 수 있는 대상인 셈이다. 이러한 미물들은 거대한 자연과 도시 공간의 구성물이기도 하지만, 타자와 다른 각각의 개성과 존엄한 생명을 지닌 독립된 개체이다. 드러나지 않은 작은 물상들이 뿜어내는 에너지는 평범한 우리의 삶을 탄탄하게 받쳐준다.

Ⅱ. 매화와 산새를 관찰하다, 「관매화산금(觀梅花山禽)」
예로부터 매화는 사군자의 한 소재로, 모진 세월을 이겨낸 절개의 상징이자 가장 먼저 봄을 알리는 순결의 메타포였다. 봄이 그리워 눈 속에서 매화를 찾아 헤맸다는 당나라 맹호연(孟浩然, 689-740)이나 학을 아들로 삼고 매화를 아내로 삼아 고산(孤山)에서 은거했다는 임포(林逋, 967-1028)의 고사가 은둔과 고결한 매화의 상징성을 알려준다. 또한 매화는 아리따운 여인을 은유하기도 했다. 수(隋)나라 조사웅(趙師雄)이 나부산(羅浮山)에 갔다가 황홀한 경지에서 어여쁜 여인을 만나 술을 마시며 즐거운 하룻밤을 보냈는데, 다음 날 아침에 보니 자기가 큰 매화나무 아래에 술에 취해서 누워 있더라는 매화 선녀의 전설이 대표적이다.
진민욱은 2017년 1월과 4월 창덕궁의 만첩홍매를 방문했다. 나무 주변을 돌아다니며 다양한 각도에서 스케치하니 미처 알지 못했던 매화의 새로운 모양새가 발견되었다. 옆으로 긴 화폭에 봄의 대명사인 매화가지와 탐스러운 홍매를 포치하고 그 위에 앉아 봄을 만끽하는 다양한 새를 그려나갔다. 그리고 작품을 벽에 부착하지 않고 천장에 매달아 반타원형이 되도록 설치했다. 전시장에 그림으로 메타포 된 매화나무를 심은 셈이다. 따라서 이 그림의 감상자는 마치 만첩홍매나무숲에 들어가 거닐며 꽃을 감상하는 느낌을 부여받는다. 이렇게 탄생된 그림이 「관매화상금(觀梅花山禽)」(2017)이다. 이 작품에 대한 작가의 작업 노트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무엇을 그리든지 대상의 본질을 보고 보편적인 진실을 작업으로 탐구하려는 것은 본인작업에서 늘 추구하는 자세였다. 2014년에 풍경을 그리는 데 관심이 생겨 자료를 모으기 위해 산책길에 오르기 시작하면서 도시와 산을 구성하는 주변 자연물들도 같이 사진과 작은 드로잉으로 기록하기 시작했다. 길가에 가로수, 정원의 돌, 산과 도시를 오가는 미물들은 산이 상징하는 자연전체의 일부이자 생명을 가진 독립된 개체들이다. 작은 자연물들이 시시각각 뽐내는 생명력은 무미건조해져가는 우리의 일상을 곁에서 묵묵히 밝혀준다.
 진민욱은 매화의 고유한 함의를 간직하되 이동 시점에 의한 관찰을 부각하면서 꽃잎 하나, 새 깃털 한 개에도 긴장을 놓지 않았다. 반타원형 형태로 설치한 「관매화산금」을 보면 칠관법(七觀法)이 연상된다. 칠관법이란 왕백민이 1980년 < < 신미술 > > 「중국산수화 '칠관법' 제언」이라는 논문에서 발표한 시각법이다. 왕백민이 언급한 관찰의 일곱 가지 방법은 (1) 걸음걸음마다 보는 방법(步步看) (2) 여러 면을 보는 방법(面面看) (3) 집중적으로 보는 방법(專一看) (4) 멀리 밀어서 보는 법(椎達看) (5) 가까이 끌어당겨 보는 방법(拉近看) (6) 시점을 옮겨서 보는 방법(取移視) (7) 6원(곽희의 삼원법과 한졸의 삼원법)을 결합시켜 보는 방법(合六遠)이다.  특히 「관매화산금」에서는 걸음걸음마다 보는 방법인 '보보간(步步看)'이 두드러진다. 매화나무의 뿌리 부분은 생략한 채 사람의 편안한 시선이 머물 위치의 무성한 홍매가지를 배열했기 때문이다. 또한 다른 각도에서 보이는 매화 단면을 재조합한 조형성에서는 여러 면을 보는 방법인 '면면간(面面看)'도 목격된다. 이렇듯 작가가 매화를 해체한 까닭은 대상을 관찰하면서 느낀 다양한 경험을 입체적으로 재현하고자 함이다. 즉 오감을 통해 느낀 감정을 2차원의 평면에 표현하려 하니 묘사 방법에서 한계에 직면한 것이다.
 진민욱은 송 휘종(宋 徽宗, 趙佶, 1082-1135)이 그린 「납매산금도(腊梅山禽圖)」나 「오색앵무도(五色鸚鵡圖)」의 구도를 참조하여 매화가지와 새를 포치했다. 매화 위에 앉아 있는 새들은 우리나라 도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딱따구리, 비둘기, 박새, 딱새, 참새, 할미새 등이다. 작가는 생태조사 보고서를 토대로 새의 종류를 확인하고 그 특징을 묘사했다. 생태학적으로 볼 때 이러한 새들은 같은 계절, 같은 지역에 공존하지 않은 생물일 수 있다. 또한 실재 매화가지 위에 앉은 새를 직접 보고 그린 것도 아니다. 그러나 진민욱의 봄이 시간성을 떠난 심리적, 정서적 봄인 것처럼, 그의 그림에서 새의 생물학적 호칭 부여는 중요하지 않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매화와 새가 현실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상상의 존재이기도 한 까닭이다.

Ⅲ. 실경(實景)의 환상적인 변이
2018년 작업부터 작가가 방문한 장소의 실재 지명이 작품명으로 등장한다. 「연희매화작필도(延禧梅花雀鵯圖)」(2016), 「이태원매규도(梨泰院梅葵圖)」(2017), 「방배춘춘(方背春春)」 (2018), 「성북남만시소조도(成北南蠻柹小鳥圖)」(2018), 「삼산리소경」(2018) 등이 그 사례들이다. 그림에 제시된 지명은 작가가 현재 거주하고 있는 서울 한 동네이거나, 2017년 1년간 대구 소재의 레지던시에 머물면서 답사한 경북, 경남 지역이다.  이렇듯 분명한 장소성이 제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화폭에 재현된 사물들은 매우 환상적이다. 각각의 사물이 과학적 원근법이나 투시법에 의거하지 않고 작가가 여러 각도에서 목도한 장면을 해체한 뒤 재구성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효과를 위해 작가는 앞서 언급한 칠관법 중에서 (3) 집중적으로 보는 방법(專一看) (4) 멀리 밀어서 보는 법(椎達看) (5) 가까이 끌어당겨 보는 방법(拉近看) (6) 시점을 옮겨서 보는 방법(取移視)을 추가했다. 하나의 시점이 부여하는 단순함을 극복하고자 사물을 해체하여 다시 조합한 콜라쥬 기법을 선택한 것이다. 작가는 작업 과정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원경을 촬영할 때 건물의 높이와 거리에 따라 사진을 나누어서 찍는다. 출력한 흑백 사진을 관찰 시점에 따라 분절하고 그 지역의 자연물을 겹치게 배치했고, 근경에서 촬영한 사진을 참고해서 각각의 대상을 최대한 사실적으로 그린다. 다만 사진의 빛과 그림자를 생략하고 원근을 무시한 채 선과 색의 단계 변화에 주력했다. …동시에 다른 지역과 시간에 수집된 자연물들을 겹쳐 묘사하면서 사각의 틀 안에 무한한 시공간의 확장의 가능성이 있음을 암시하고자 하는 의도이다.
진민욱의 콜라쥬 기법에서 데이비드 호크니(David Hockney, 1937-)의 작품이 연상된다. 호크니는 그의 1980년대 포토 콜라쥬에서 잠시도 쉬지 않고 움직이는 사람을 촬영하며 조지 로울리(George Rowley)가 도입한 '움직이는 시점(moving point)'을 활용했다. 호크니는 이러한 포토 콜라쥬 작업에 '집합', '결합'을 뜻하는 「조이너(joiner)」라는 작품명을 붙였다. 변화하는 시점을 결합하여 일점 원근법에서 다중적 복합원근법으로 확장된 시각성을 표현했기 때문이다.
 진민욱의 대상 포착 방식은 호크니의 움직이는 시점과 일견 유사해 보인다. 그러나 진민욱은 움직이는 시점을 활용하되 다른 시간대에 공간에서 수집한 대상을 한 화면에 재구성했다. 이러한 방식은 원대 조맹부(趙孟頫, 1254-1322)의 「작화추색도(鵲華秋色圖)」에서 발견된다. 널리 알려졌듯이 「작화추색도」는 조맹부가 실제로 유람한 제남 부근의 화부주산(華不注山)과 작산(鵲山)을 그린 그림이다. 그러나 제남에서 화부주산(華不注山)과 작산(鵲山)은 한 시야에 들어올 수 없는 먼 거리에 떨어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맹부는 두 산을 한 화면에 배치했다. 조맹부의 「작화추색도」처럼 진민욱의 작품에는 여러 장소에서 수집한 대상들이 결집되었고, 한 화면에 두 가지 원근법이 존재하기도 한다. 작가는 이러한 시형식을 '중첩 원근법'이라고 호명했다.
작가의 오감을 두루 거쳐 재탄생된 화폭은 현실경과 이상경, 상상과 망상,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며 사실적이지만 신비로운 감정을 유발시킨다. 그리고 이러한 미묘한 감정은 진하지 않지만 산뜻하고 담담한 색채 배합으로 더욱 배가된다. 먹과 광물성 안료를 아교에 묽게 풀어 칠하고 말리기를 반복한 후 색을 올리는 고전적인 채색 기법을 활용하여 일상의 사물들을 꼼꼼하고 섬세하게 재현한 것이다. 하나의 대상을 완성하려면 여러 번 수정을 거쳐야 하고 가끔 이 과정에서 완전히 다른 구성의 작품으로 완성되기도 한다.
 동양예술론의 묘사 개념 중에는 궁정화원 화가들의 기록화를 그릴 때 일컫는 '형사(形似)'가 있다. 진민욱의 그림을 보면, 사물의 배치는 콜라쥬 기법을 활용했지만 각 대상의 묘사는 철저하면서도 완벽하다. 그리고 묘사 방식은 가시적인 형태를 화폭에 그대로 옮기는 형사를 넘어, 동진의 인물화가인 고개지(顧愷之, 약 348-405)가 언급한 '이형사신(以形寫神)'의 '신사(神似)'에 이르렀다. 즉 상을 옮겨 묘함을 얻는 '천상묘득(遷想妙得)'의 과정을 거쳐 사물의 정신을 닮게 하는 '신사'를 추구한 것이다.
 새로운 생명이 움트는 싱그러운 봄날, 상춘으로 가득한 소소경을 감상하면서 미처 간과했던 자연 미물의 소중함을 깨닫고, 그들이 먼저 건네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게 될 것이다. 진민욱이 창출한 상춘지경이 더욱 소중하고 정겨운 이유이다.